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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영국 문학사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영국에는 크게 세 부류의 시인들이 있었다. 우선 첫 부류로는 전통적 영시의 기풍을 따라 시를 쓰는 시인들이다. 영문학사가들 중에는 빅토리아 여왕 후반기에 영시는 쇠약해저 생명력을 잃은채 후기 낭만주의풍으로 쓰여지고 있다가 엘리엇과 파운드에 의해 새롭게 생명력을 얻은 것처럼 설명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20세기 시인들 중에도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를 쓰면서도 훌륭한 시를 쓴느 사람들이 있었다. 두번째로는 전통양식의 시에 만족을 못 느낀채 혁신적인 새로운 시만이 시대의 현실과 현대인의 문제를 담아낼 수 있다고 보고 새로운 시를 실험해보는 시인들을 들 수 있다. 세번째 부류의 시인으로는 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경험하면서 전쟁을 고발하거나, 혹은 사회주의 등의 좌익 사상에 몰입되어 사회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인 작가들을 들 수 있다.

전통적 시작법으로 시를 쓰면서도 훌륭한 시를 썼던 대표적인 시인은 토마스 하디이다. 그는 소설쓰기를 그만둔 후 시인으로서 새로운 출발을 한 셈이었는데, 그는 때로는 웨섹스 지역 사투리를 사용하여 독자들을 신선한 충격에 빠트리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는 평이한 문체와 전통적 음조로 작가의 감상을 배제하지 않은 채, 작가가 직접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는 전통적 형식의 시를 썼다. 하우스맨이나 예이츠의 초기 시들도 이 계열에 속한다.

두번째 부류의 시는 모더니즘이라 지칭되는 시의 혁명을 이 시기에 일으킨 시인들이 쓴 시이다. 그것은 낭문주의의 애매성과 안이한 주정주의를 반박하며 에즈라 파운드를 위시하여 에이미 로월, 리차드 아딩튼, 힐다 둘리틀 등의 시인들이 일으켰던 이미지스트 운동에 의해 촉발되었다. 사물을 직접 취급하고 묘사에 도움이 되지않는 모든 말들ㅇ르 피하여 확고하고 선명하며 명확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메트로놈을 사용하는것같은 기계적 운율이 아닌 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운율과 리듬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모더니스트 시인들은 확실히 기존의 시들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시를 쓰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들은 짧고 묘사를 위주로 하는 시에는 적합했으나 보다 복잡한 생각을 표현 하고 깊이 있는 감흥을 주는 시를 쓰기에는 미흡한 점이 많았다. 지적 복잡성과 현대인의 삶의 실제를 담아낼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하는 욕구가 충족되지않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미묘함과 암시성, 17세기 형이상학파 시인들을 재발견하면서 찾아낸 것들- 일상회화의 언어와 리듬의 도입, 구어투, 심지어는 속어투의 차용, 아이러니와 위트, 동음이의어의 재미 등-은 이미지즘의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수 있게 해주었다. 이미지즘이 가르쳐준 구체성과 정확성 언어의 엄밀성과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 형이상학파에게서 배운 복잡성과 암시성, 다층성을 결합시키면서 엘리엇은 현대인의 자의식, 고독, 소외, 전통, 신, 믿음, 자연과의 단절, 삶의 무의미성, 문명과 역사 등의 문제를 그려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그의 시는 선대 작가들의 글귀를 너무 많이 인용하거나 암시하고 있어서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 단점이다. 이런 특징 때문에 엘리엇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작가들의 시는 지나치게 엘리트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문명의 기반이 붕괴했고, 전통적 가치도 소멸되었다는 의식이 엘리엇의 황무지와 같은 시에서 은유적으로 제시되고 있다면, 1차 대전은 또 다른 방식으로 이 시기의 시에 영향을 끼쳤다. 일군의 시인들은 전쟁의 포화를 직접 맞으며 자신들이 경험했던 그 끔찍한 현실과 인간성에 대한 깨달음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 하고자 했다.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많은 영국인들은 막연한 낭만주의적 환상이나 영웅주의적 기대를 품고 있었고, 루퍼트 브루크, 존 프라만과 같은 시인들은 이러한 시류를 반영하는 애국시를 썼다. 그러나 전쟁이 막상 예상보다 오래 지속되자 아이작 로젠버그, 윌프레드 오웬같은 이는 전쟁에 대한 영웅주의적 환상을 벗개내는 시를 쓰고자했다. 전쟁후 환멸의 시기라 할 수 있는 30년대에 이르면 W.H. 오든, 스티픈 스펜더, C.D. 루이스와 같은 시인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새로운 시는 현대적이고, 사회의식을 지니고 있어야하며, 좌익이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30년대 후반을 파시즘과 싸우며 지냈고 스페인 내란이 터지자 감상적으로 스탈린 주의자가 되었는데 그렇다고해도 끝까지 스탈린주의를 밀고 나갈만큼 근본적으로 좌익이지는 않았다. 이러한 내적 모순은 생애 후반기에 오든이 종교적인 관점으로 돌아갔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20세기 초반기의 시에 대한 위의 세가지 분류중 그 어느쪽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시인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이다. 예이츠는 오래살기도하였거니와 시풍도 여러번의 변화를 겪기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그의 초기시는 낭만주의적 전통에 뿌리를 박고있다. 그는 월터 페이터와 오스카 와일드의 영향으로 유미주의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는데 거기에 아일랜드의 민담, 신비사상을 결합하여 꿈결같은 이미저리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명징성과 통어력을 지닌 독특한 시세계를 이룩한다. 그의 자의식적인 낭만주의에 견고성을 실어준 것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였다. 그는 아일랜드인들의 활기찬 민족적 삶을 이룩하려는 문화적 결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아일랜드 문예부흥 운동에 깊이 간여하면서 보다 소박하고 대중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게 되는 등시세계의 변화를 겪는다. 이후에도 그의 시는 변신을 거듭하여 후기에는 탑과 나선형 계단을 상징으로 사용하는 일련의 형이상학적인 시를 썼고 말기에는 기성 종교들과 비교, 신화와 민담에서 자신만의 신화체계를 구성해냈는데 이 신화체계야말로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할수있는 그만의 참조체계이자 상징과 믿음의 체계였다. 그의 시 변화상은 20세기 시 역사의 일종의 축소판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