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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영국문학사

전쟁은 몇가지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전례없는 거대한 국가권력과 집단적 통제체제를 수립했던 전쟁의 영향으로 산업 제분야뿐 아니라 사회복지, 주택정책 여성의 지위와 같은 여타 영역들도 변화를 겪었다. 자유무역의 원칙을 포함하여 전쟁전의 낡은 자유방임의 구호는 회피되거나 무시되었다. 전통적인 노사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으로 변화했다. 전쟁은 노동계급의 의식을 강화하는데 기여했고 노동당에게 새로운 목적의식을 부여하여 1918년 작성된 노동당 당헌은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편 국가는 전쟁동안에 이루어진 노동계급의 지지에 대한 보상으로 1918년 작성된 노동당 당헌은 사회주의 정당으로서의 노동당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줬다. 한편 국가는 전쟁동안에 이루어진 노동계급의 지지에 대한 보상으로 1918년 성인 남자 보통 선거권을 부여하여 거의 모든 노동자를 유권자로 만들었는데 이것은 계급적 기초에 다라 정치를 양극화하는 경향을 촉진시키면서 노동당을 강화시켰다.

전후 정치의 가장 큰 변화는 노동당의 성장과 연관되어있다. 전후 내각을 이끌던 로이드 조지는 자유당과 보수당 연합 정권에 기반하고 있었는데 1922년 보수당이 연립내각에서 사퇴하자 자유당은 몰락했고 이들이 내준 빈 자리를 노동당이 채우게 되었다. 쇠락하는 자유당과 부상하는 노동당으로 경쟁자가 분열하는 사이에 이득을 본 보수당이 이 시기를 주도하였으나, 1924년 보나 로가 건강 악화로 사임하자 영국 사상최초의 노동당 정부가 성립되게 된다. 노동당 정부는 큰 업적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노동당의 통치능력을 증명하고 양당제의 한쭉 파트너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려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영국 경제는 1차 대전 이전부터 이미 여러문제를 안고있었다. 전쟁기간 중 영국은 재무장과 군수사업등으로 일시적으로 회복되었으나 평화가 도래하자 해묵은 문제들이 결국 다시 나타났다. 전쟁 중 영국은 많은 무역 상대국을 미국과 일본에 빼앗겼으며 일부산업은 유럽 다른 국가와 미국의 보다 능률적인 생산에 밀리게 되었다. 1926년의 총파업과 1930년대의 대공황 등이 영국 경제에 먹구름을 드리웠고 결국 영국은 파운드화의 금본위제를 폐하고 1932년 제국우대관세를 도입함으로써 1세기 동안 지속되었던 자유방임주의를 드디어 종결지었다. 1920-30년대의 가장 큰 쟁점은 실업이었으나 직업이 있는 사람들은 점점 더 잘 살게 되어 대중들은 댈스홀, 라디오, 화장품을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여가시간에서 영화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국가의 적극적인 주택정책의 결과 화이트 칼라층의 사무직과 전문직 종사자로 구성된 1930년대 중산계급은 지하철이 연결되는 도시근교지역에 살면서 삶의 풍요를 경험했다.

전쟁의 최고 수혜자는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여성들은 종교와 행정사무, 군수공장과 다른 기계공장들 그리고 그 동안 여성들에게 친숙하게 여겨지지않았던 여러일들에서 기회를 많이 찾았다. 총력전에서 초래된 파괴 그 자체가 영국여성들을 수십년간 제약해온 성의 장벽을 무너뜨리도록 압력을 가했다. 여성들이 시민권을 완전히 행사하지못한다는 주장은 이제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결국 1918년 30세 이상의 여성에서 투표권이 주어졌다. 한편 영국 내에서의 이러한 여러 변화들과는 상관없이 국외 상황은 돌아가고 있었다. 영국의 예상과는 다르게 성장해버린 히틀러의 독일은 뮌헨에서의 약속을 저버리고 폴란드를 점령함으로써 영국을 다시금 제 2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으로 밀어넣었다.

 

제 2차 세계대전

1939년 9월 영국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초기 전황은 영국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영국은 과거와 같이 해상봉쇄를 주전략으로 삼았으나 독일의 공군력이나 경제적 자급자족의 정도를 계산에 넣지않고있었기 때문에 해상 작전은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못했고 영국은 궁지로 몰리게 되었다. 1940년 6월 22일 프랑스까지 항복하면서 영국의 러시아가 참전할 때가지 정확히 1년동안 혼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항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인민의 전쟁이라 불리웠다. 전국민이 총동원되었고, 전쟁말기에는 50만명의 여성이 군대에 편성될 정도였다. 영국만이 독일에 대항해 남아 있다는 국민적 일체감이 인민전쟁으로서의 성격을 더 크게 부여하였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매우 비싼 대가를 지불하였다. 영국인 민간인 사망자만도 6만명에 달했고 공습으로 인해 전체 가옥의 1/2에 해당하는 400만호가 손실되는 등 총국가자산의 10%를 잃어버렸다. 그뿐아니라, 전쟁이 끝난후에는 미국과 소련에 비해 왜소해진 영국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전쟁 초기에는 대공황이 야기된 실업이 여전히 계속되었으나, 1943년에는 노동력 부족 사태가 일어났고 실질 임금은 9% 증가했다. 전쟁 중에도 영화는 계속 인기를 누려 관람객 수에서 계속 신기록을 갱신하였으며 영화관 외에 댄스홀도 노동계급의 주요 여흥 장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