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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영국 문학사

역사적 배경

20세기라 하면 1901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영국의 20세기의 시작은 비교적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오랜동안 영국을 통치해왔던 빅토리아 여왕이 죽고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면서 영국의 20세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다만 20세기 후반기의 영문학과 영국사를 논하기는 아직 이른 감이 있으므로 본 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까지의 영국문학과 영국사를 다루는 것으로 그 시기를 제한하기로 하겠다.

1901년부터 1945년까지의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적 가치관은 무너지고 이제는 사회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를 찾기가 어렵게 되었다. 

영국 경제와 산업은 새로이 부상하는 유럽 다른 국가와 미국에 추격을 당하게되어 영국 정책의 지배적 기조였던 자유방임철학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한다. 농촌은 쇠락하는 반면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이들이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갖게 되면서 결국에는 노동당이 성립된다. 그리하여 영국 정치는 이제까지 양당체제를 형성해왔던 보수당 대 자유당의 대결구도 대신 보수당 대 노동당의 대결구도로 재편된다. 한편 각국의 제국주의적 경쟁과 이와 동시에 호전적으로 부추켜진 민족주의적 감정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사건을 통해 분출된다.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라 불리워지는 이 전쟁을 통해 영국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는 데 그 중에서도 여성의 지위향상, 선거권 확대, 매스컴의 영향력 확장등이 두드러진다.

 

1차 세계대전 이전: 1901-1914

빅토리아 여왕 말기부터 이미 전통적인 안정이 흔들리는 징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선 전통적인 영국 경제정책에서 선호되었던 자유무역, 자유방임 경제에 대한 비판이 점차 거세어 지면서 경제에 대한 정부의 더 큰 개입을 요구하는 신자유 주의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찰스 부스와 씨봄 라운트리가 작성한 빈곤층에 대한 일련의 체계적인 조사보고들은 영국제국의 국민이 그토록 가난할 수 있다는 각성을 확산시키면서 빈곤이 개인의 성품과 자질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라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따라서 1906년 이래 장기 집권한 자유당 정부는 학교급식, 노령연금, 국민보험을 가능하게 하는 일련의 사회보장법을 입안하고 추진하게 되었고, 이제 영국은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자유방임정책에서 부분적으로나마 탈피하여 근대적 복지국가로 발돋움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1901년의 태프베일 판결사건은 노동자들이 이제까지 자신들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해 왔던 자유당과 결별하고 노동 계급으로서의 의식을 확실히 갖게하는 계기로 작용하면서 노동당 창당을 촉진시켰다. 이제 영국에서는 계급이 종교를 대신하게 되었다. 한편 1902년 남아프리카지역에서 발발한 보어전쟁은 영국에 내재하던 문제들이 표출되는 기회가 되었다. 즉 영국의 힘은 사실상 거대하지 않으며 게다가 힘마저도 유지하기 힘들다는 뼈아픈 인식을 가져다 준 것이다. 영국은 제국의 보다 효율적인 경영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자유무역 정책이 더이상 영국의 이익을 보장하지 않는 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1903년 관세개혁동안 영국이 외교정책에서 일관되게 유지해왔던 영광스런 고립정책의 위험성을 보여주었으므로 영국은 1902년 영일 동맹을 기점으로 이러한 고립정책에서 벗어나려 시도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 1914-1918

일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어느 한 나라의 책임이 아니었다. 지난 40여년 조장되어 온 강대국들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었고 이런 와중에 각국이 경쟁적으로 부추겼던 민족주의적 감정은 분출될 기회만을 기다리고있었다. 유럽의 강대국들은 동맹체계로 서로 복잡하게 엉켜있어서 국지전이 국제전으로 확대될 가능성은 이미 준비되어있는 셈이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여러번 소규모의 국제분쟁이 있었고 보스니아 민족주의 집단이 세르비아를 방문중이던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사건은 메마른 짚섶에 튄 불똥의 역할을 한 것 뿐이었다. 유럽의 세력균형을 깨트리고 있는 독일에 대한 적개심이 증폭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마지막까지 전쟁참여를 주저하였으나, 독일이 중립국인 벨기에를 침략하자 어쩔 수 없이 전쟁에 말려들게 되었다. 영국은 전쟁이 조기에 종결되리라는 기대속에 참전했으나 영국의 기대와는 달리 영국군은 초반에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였고 4년에 걸친 서부전선의 정체가 시작되었다.

당시 영국은 노조동맹이 연대파업을 벌이려 하고 있었고, 아일랜드는 거의 내란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이러한 갈등은 놀라운 속도로 가라앉았고, 공통된 목표에 대한 잠재적 합의가 국민을 사로잡았다. 전쟁의 정당성에 관한 광범한 합의는 이후의 끔찍한 4년동안 근본적으로 잠식당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러한 합의는 상당한 정도로 보도와 언론검열, 독일인들의 만행에 대한 조작된 이야기들에 의해 유지되었고, 급진적인 혹은 반전 논조의 비평에 대해서는 많은 탄압이 가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독일의 항복을 받을때까지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라도 전쟁을 계속해야한다는 믿음을 가졌던것 같다.

1차 세계대전은 역사상 최초의 총력전이었다. 또한 역사상 어느 전쟁 보다도 규모가 큰 전쟁으로서 1917년에는 국민 총생산의 60%가 전쟁비용으로 쓰일 정도였다. 영국은 군수부를 설치하여 산업을 통제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하였으며 1917년에는 식량배급이 시작되었다. 결국 승리는 산업생산을 가장 잘 조직하고 국내의 정치적 안정을 가장 잘 유지한 국가인 미국과 영국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