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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정복과 18세기 영국 문학사

역사적 배경

혁명으로 국가의 근본이 바뀐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영국은 17세기 동안 두번의 혁명을 겪었지만 헌정체제 상의 큰변화는 없었다. 

영국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을 내세웠던 청교도 혁명은 많은 희생을 낳았지만 크롬웰의 사망과 더불어 공화정은 끝이 났고 영국은 안도하며 왕정으로 돌아갔다. 명예혁명 역시 통치의 기본이 이전의 세습왕정에서 입헌군주국으로 바뀌었지만, 이것 역시 혁명적으로 급격한 변화는 아니었고 17세기 내내 진행되었던 경향의 연장선으로 보아야할것이다. 오히려 이 시기의 변화는 헌정체제가 아닌 전반적인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아야하는데 크게 보자면 다원화 세속화 실용화라고 할수 있다 종교적으로는 생사가 걸린 심각한 문제였던 신앙이 18세기에는 종교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관용하는 쪽으로 바뀌었으며, 문학에서도 16세기의 인간상이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도전하는 파우스투스였다면 18세기에는 포우프가 썼듯이 한계를 알고 분수있게 절제하며 사는것이 미덕이 되었다. 심지어는 과학에서도 예전에는 과학을 통해 사회를 개혁하고 자연계를 지배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18세기에는 단편적인 탐구와 점진적인 개선이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찰스 2세는 국민적인 안도속에 아무조건없이 왕위로 복귀했고 그는 정치적인 관용과 폭넓은 타협으로 국가를 안정시켰다. 청교도 혁명이 종교적인 색채를 띠었던 만큼 종교의 문제가 가장 첨예했을터인데 공화국 치하 20년의 박해를 견뎌내고 다시 권력을 잡은 국교회는 관용을 용납하려하지않았다. 그결과가 비국교도들을 공직에서 배제한 심사법이다. 왕자신은 카톨릭이었지만 능란한 정치가였던 그는 임종시가지 그 사실을 숨겼으며, 왕권을 강화하고자하는 스튜어트왕가 특유의 성향으로 여러번 의회와 대립하기도 했지만 큰 문제없이 나라를 다스렸다. 그의 재임시 유일한 위기는 동생인 카톨릭 교도 제임스에게 왕위를 넘기는 문제를놓고 벌어진 휘그와의 갈등이었으나 이것역시 왕의 뜻대로 해결되어 이제 왕권은 공공연한 카톨릭 신자인 제임스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때 왕의 입장을 지지한 사람들이 토리로서 이들은 대체로 토지에 기반을 둔 젠트리와 국교회신봉자들, 그리고 성직자들과 같은 보수주의자였다. 반면에 왕에 반대했던 일파를 휘그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토리에 비해 훨씬 다양한 계층으로, 왕권을 견제하려는 귀족, 상인, 비국교도들, 유동자산에 기반을 둔 사람들이었으며 이들은 대체로 정치적 종교적인 관용을 주장하고 상업을 중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토리와 휘그의 구분은 절대적인 것은 아니어서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느슨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제임스 2세는 즉위하자마자 영국을 카톨릭 국가로 복원시키고 카톨릭 신자들에게 특권을 주기위해 노골적인 노력을 했지만, 영국민들은 아직도 왕을 처형한 기억이 생생했고 제임스가 이미 중년의 나이를 넘어선데다가 후계자로 신교도인 딸 메리가 정해져있었으므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1588년 예기치 않게 아들이 태어나면서 카톨릭 왕조로 세습될 위기에 처하자 의회 양당의 지도자들은 메리와 그 남편 오렌지 공 윌리엄을 불러들였고, 윌리엄 역시 영국의 왕위에 대한 야망이 있었기에 이에 응하여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영국에 상륙했다. 의회는 왕을 폐위시킬 생각까지는 없었고 왕에게 납득할만한 양보를 얻어내는 선에서 마무리하려고 했으나 제임스가 돌연 프랑스로 도망감으로써 왕위는 결구 메리와 윌리엄에게로 넘어가고 이로써 영국에서는 17세기들어 두번째 혁명, 즉 명예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